21st Century Game Archive

게임에 대한 소소한 고찰

[스포일러 有]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에서 제스트랄의 역할과 디자인

츤곰 2025. 5. 5. 19:23

※본 글의 가독성은 PC에 최적화 되었습니다※

본 글은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내용은 작성자 개인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감안해주시길 바랍니다.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이하 33원정대)는 요즘 출시되는 AAA 혹은 AA 게임들과 확연히 다른 스토리텔링 방식을 취한다. 마치 프롬 소프트웨어의 세계관처럼, 유저가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니며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면 완전한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으며, 무작정 엔딩만 보게 되면 진행 과정에 의문이 남는다.

이런 이야기 전달 방식을 택한 게임에는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존재한다. 다크한 세계관이나 복잡한 내러티브를 가진 게임일수록, 게임의 몰입감을 해치는 요소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33원정대는 ‘균열’이라는 사건을 기점으로 ‘뤼미에르’와 그 외부 세계가 철저히 구분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작중에서 뤼미에르 외부를 탐사하는 플레이어는 원정대 일행을 제외하고는 인간으로 분류되는 생물을 만날 수 없다. 이 설정은 기획 단계에서 상당한 고민거리를 던진다. RPG 게임에서 필수적인 요소인 화폐와 상점 구성에서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달러나 원 같은 전통적인 화폐 체계를 사용할 수 없고, 과거의 물물교환에서 발전된 일반적인 상점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하면 개연성이 떨어지게 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거래에는 반드시 설득력 있는 설정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마물과 인간이 거래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금화를 주고 검과 방패를 사는 상황은 몰입되기 어렵다. 오히려 생태계 내에서 해당 마물의 천적에게서 얻는 소재나 먹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그 마물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정수를 받아 장비를 제조하는 구조가 훨씬 몰입감을 줄 것이다. 대략 이런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33원정대는 이러한 화폐 및 상인 문제를 ‘제스트랄’이라는 생물로 해결했다. 제스트랄이라는 캐릭터가 클레아나 베르소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행동의 당위성이 생긴다는 설명은 통용되지 않는다. 게임을 진행하는 유저는 이 사실을 게임 후반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초반의 개연성을 위해서는 별도의 설정이 필요하다. 제스트랄은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외형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소형 개체, 롱다리 개체, 뚱뚱한 개체 등 각양각색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성한 강’이라는 장소에서 기억을 잃더라도 육체는 재생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제스트랄은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싸움을 즐기며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개체가 많다. 실제로 제스트랄 마을이나 대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투기장이고, 제스트랄 해변에서는 아기 제스트랄을 대포처럼 사용하는 모습을 통해 이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종족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예측불가능하고 다소 미친 듯한 성격을 지닌 종족이 기획 상에서 가지는 장점은 분명하다. 바로 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유저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게임 내에서 상인 역할을 맡은 제스트랄은 거석 위든, 세상의 끝이든, 사람이 발을 디디기 힘든 곳이든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들은 심지어 “여기는 사람이 잘 안 와서 좀 한가하네.” 같은 대사 한마디만 던진 채, 아무렇지 않게 상인 역할을 수행한다.

 

 

비슷한 예로, 《던전앤파이터》에서 던전을 클리어하면 항상 NPC 데릴라가 등장하는데, 이는 데릴라가 최종보스가 아니냐는 밈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이처럼 위험한 지역에 상인이 나타나는 설정은 몰입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 특히 33원정대처럼 설정의 디테일이 중요한 게임에서는, 이러한 개연성 부족이 몰입감을 심각하게 해칠 수 있다. 하지만 제스트랄이 상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유저에게 충분히 납득될 수 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며, 싸움을 즐기고, 강함을 증명하고 싶어하며, 어디선가 나사가 빠진 듯한 인상을 주는 종족이라는 인식 덕분이다. 이런 제스트랄 상인은 RPG에서 상인 시스템이라는 필수 요소를 유지하면서도 몰입감을 해치지 않는 훌륭한 장치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화폐 개념은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제스트랄 상인에게 물건을 구매할 때 사용하는 화폐는 ‘크로마’다. 크로마는 단순한 통화 수단이 아니라, 마력이나 마나와 유사한 개념으로 작용한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능력의 원천이며, 데성드르 가문의 그림 속 생물들은 전부 크로마로 구성되어 있다.이 설정은 게임 후반부에 드러나지만, 이로 인해 크로마를 거래하는 행위는 단순한 구매가 아니라, 매우 가치 있는 자원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구조가 된다. 돈에 별 관심 없을 것 같고, 아무거나 받아도 그냥 부숴버릴 것 같은 제스트랄이 크로마에 한해서는 물건을 파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제스트랄 상인들과는 전투를 할 수도 있다. 이는 상인을 공격해서 약탈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1:1 대결을 통해 진행된다. 앞서 언급했듯 제스트랄은 전투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이 설정에 따라, 강한 자에게만 좋은 물건을 제공한다는 조건이 붙고, 그들을 이기면 특수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상점 개념을 더 특별하게 만들고, 제스트랄이라는 종족의 특징을 잘 활용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게임이 전달하는 철학적 메시지와 제스트랄이라는 캐릭터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실, 게임 구현 단계에서 핵심적인 설정은 앞서 다룬 시스템적 요소들이다. 하지만 메시지적 측면에서 제스트랄을 바라본다면, 이들은 게임에서 제시하는 완벽한 생물체의 군상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종족이다. 33원정대가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은 ‘상실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강인함’이다. 삶이 소중하려면 죽음도 소중해야 하며, 죽음을 부정하는 순간 세계의 균형은 무너진다. 통칭 ‘마엘 엔딩’을 본 사람이라면, 죽음을 부정했을 때 세계가 얼마나 빛을 잃는지 잘 알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스타브의 퇴장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박수치며 보내줄 수 있었다. 그의 서사는 루느아르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스트랄은 상실의 고통이나 죽음의 소중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베르소를 통해 이를 학습한 모노코를 제외하면 말이다. 모노코는 자신을 그린 베르소와 그려진 베르소 모두를 인지하며, 노코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이를 통해 제스트랄이라는 종족도 학습을 통해 감정과 의미를 인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제스트랄의 수장인 골그라는 신성한 강에서 무분별하게 부활하는 제스트랄을 제지하고 있다. 그는 죽음의 가치를 높이고, 동족들에게 이를 학습시켜 더 완전한 종족을 만들고자 한다. 마을 내에는 투기장이 존재하지만, 실제 사망이 발생할 수 있는 ‘어둠의 투기장’은 골그가 철저히 단속하고 있다. 이처럼 제스트랄은 단순히 게임 내 그림 세계의 종족을 넘어, 네브론, 에스키에, 그란디스와 같이 게임의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이자, 상인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게임 속에 녹여낸 장치로도 기능한다. 게임을 바라볼 때 단순한 캐릭터 묘사를 넘어, 그 캐릭터가 어떤 장치로 작용하며 유저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