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st Century Game Archive

게임에 대한 소소한 고찰

[스포일러 有]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 구스타브와 엔딩의 기획 의도에 대한 망상

츤곰 2025. 5. 9. 19:24

※본 글의 가독성은 PC에 최적화 되었습니다※

본 글은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워킹데드,단간론파,발더스 게이트3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내용은 작성자 개인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감안해주시길 바랍니다.

 

 

게임을 하다보면 종종 등장인물이 리타이어하고는 한다. 더군다나 그 인물이 유저가 직접 조종하는 주인공 격에 가까운 캐릭터라면 그 충격은 배가 된다. 서사적으로 이런 시도는 낯선 것이 아니다. 워킹데드의 리, 단간론파V3의 아카마츠 카에데 등이 그 예시다. 보통 우리는 유저가 조종하는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어있고, 그렇게 설계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물들을 퇴장시킬 때는 확실한 의도를 가져야 한다.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이하 33원정대)에서는 구스타브가 해당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구스타브는 어떤 의도로 설계된 캐릭터이고 이를 위해 기획 단계에서 어떤 부분들이 고려되었을까 역으로 생각해보자.

 

구스타브는 1차적으로 페인트리스를 저지하러 가는 원정대의 왕도적 서사에 몰입시키기 위해 디자인 되었다. 소피를 잃는 고마주 연출은 유저로 하여금 왜 원정을 떠나야 하는가 사명감을 부여하고, 르누아르에게 원정대가 박살나고 시체더미에서 자살을 고민하는 연출은 이 원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위대한지 유저에게 인식시켜준다. 원정대 일지 역시 이런 역할을 충실히 한다. 그 과정에서 약한 모습, 포기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이어서 루네에게 혼나고 마음을 다잡고 일어서는 모습도 보이게 된다.

 

제작진이 설정 해놓은 바람직한 인간 군상을 생각해보자.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상실의 고통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 두 번째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 것, 삶은 죽음으로써 의미 있고 빛난다는 것이다. 이 게임에서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그래도 내일은 온다]라는 문장을 떠올려보면 무슨 의미인지 와닿을 것이다. 구스타브는 가장 불완전한 캐릭터였다.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지도 못했고, 죽음을 부정했다. 오히려 전진성을 보이는 것은 루네고, 죽음에 초연했던 것은 남편을 잃었던 시엘이었다. 동료들을 통해 각성해나가는 구스타브는 단순 주인공의 서사적 각성을 넘어 유저로 하여금 이 원정의 웅장함과 간절함 같은 감정 등을 강화시키는 장치가 된다.

 

구스타브는 루네한테 혼나고 3초만에 정신차린다. 단순 인물 갈등이 중심인 이야기었다면 구스타브가 그렇게 빨리 정신을 차리면 안된다. 구스타브의 성장 과정은 구스타브라는 인물의 각성보다 우리는 그럼에도 나아가야해, 라는 의미의 원정대의 비장한 각오를 더 강조하는 장치인 것이다. 이렇게 구스타브를 중심으로 원정대 서사에 너무나 잘 몰입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엔딩 및 데성드르 가문 스토리 드리프트에 엄청난 호불호가 갈리는데는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원정대의 왕도적 서사를 너무 뽕차게 잘 주입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유저들 중 철학적 메세지보다는 페인트리스를 쓰러트리는 원정대의 멋드러진 서사를 더 중요시 여기고, 그것이 목적이었던 유저들이 크게 반발하거나 김이 샌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럼 대체 구스타브는 왜 이탈시켰는가? 표면적으로는 게임의 진 주인공인 마엘에게 토스하기 위한 가장 강한 트리거이자 원정대 서사의 강화를 위한 것이고, 2차적으로는 앞서 말한 왕도적 서사를 완전히 깨기 위한 장치의 시발점일 것이다. 구스타브의 이탈과 베르소의 합류부터 페인트리스의 생사여부과 무관하게 원정대의 서사에서 데성드르 가문의 이야기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엘을 지키자 했고, 원정대의 내일을 위해 르누아르와 끝까지 맞서고 의미있는 죽음을 맞이한 구스타브는 돌파도 절벽에서 쓰러진 순간, 게임사에서 제안하는 완벽한 인간 군상이 된 채로 리타이어하는 것이다.

구스타브의 삶은 여기서 완벽함을 찍고 퇴장하게 된다.

 

어라? 원정대 서사의 강화가 표면적 목적인데 왕도적 서사를 깨기 위한 장치라고? 앞뒤가 안맞지 않나? 맞다. 그게 기획 의도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의도가 그렇게 잡혀 있기 때문에 원정대에 몰입하고 구스타브에 몰입하고 해피엔딩을 향해 페인트리스를 잡기 위해 뼈와 살을 깎아가던 사람들이 엔딩을 비판하는 것이다. 인게임 캐릭터들이 느끼는 공통적 핵심 감정은 상실의 고통이다. 그리고 극후반부에 강조되는 감정은 허무함이다. 뤼미에르가 그저 가상현실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가상현실을 지키려는 자와 부수려는 자의 대립. 유저는 이 사이에서 선택하게 된다.

게임사의 기획 의도는 알리시아와 베르소, 넌 어느 곳의 손을 들어줄래? 너의 가치관은 어때? 라며 질문을 건네는 것일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쭉 플로우대로 따라오고 여기저기 숨겨진 클레아의 정보나 데성드르 가문의 이야기를 찾으며 왔던 이들일지 언정 이 엔딩에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갓겜이 맞다. 스토리 좋은 것도 맞다. 다만 문제는 매체가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유저의 경험은 천차만별이다. 국내 해외 커뮤니티 막론하고 엔딩의 평가는 나뉜다. 호평을 하는 이들은 철학적이고 게임의 재미도 챙긴 갓겜이고, 악평은 그냥 예술병 걸린 스토리텔링 망한 게임이다. 본인은 전자였지만 후자의 의견도 충분히 공감한다. 이 게임은 철저히 개발진들의 기획 의도와 메세지에 유저들이 전적으로 따라와줘야 재밌는 게임이다.

즉 내가 게임에 몰입할수록 실망감이 크고 영화 보듯 등장인물들을 바라봐야 더 옳은 즐기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게임이 맞나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발더스 게이트3가 왜 전무후무한 게임인가, 유저의 의도가 정확히 스토리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온전히 내가 게임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33원정대는 엔딩을 이분법적으로 제공한다. 알리시아와 베르소의 입장에서 나의 가치관을 더해 엔딩을 고르는 사람은 괜찮은데 알리시아고 나발이고 그냥 나는 내가 나의 온전한 결말을, 원하는 결말을 만들어가고 싶은 사람들한테는 전혀 공감대 형성이 안될 수 있는 것이다. 워킹데드랑 비교해보자, 워킹데드는 주인공이고 구스타브 이상으로 정든 리가 퇴장하지만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클레멘타인이 제인을 선택하던 케니를 선택하건, 그것은 내가 고른 클레멘타인의 선택이지 나의 선택이 아니다. 유저의 이야기가 애초부터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렉티브 게임이고 애초부터 드라마처럼 게이머들이 접근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발더스 게이트3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발더스는 유저의 의도와 게임에서 제공하는 변화가 대부분 일치한다. 게임하다가 마음에 안드는 NPC를 싸움을 걸어서 죽일 수 있고, 스닉 플레이를 하고 싶다면 할 수 있게 충분히 구현되어 있다. 그렇기에 온전히 나의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고, 그런 부분들에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것이다. 엔딩도 마찬가지다. 네더브레인이 마지막에 우리에게 선택지를 주었을 때, 그것은 게임에 온전히 몰입하고 있는 나의 선택이었다. 

 

커뮤니티의 흥미로운 글을 봤다. 차라리 2막 끝나고 깔끔하게 엔딩 내버린 다음에 애프터 스토리 느낌으로 데성드르 가문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어떠냐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은 개선안인 것 같다. 1막 구스타브 2막 베르소 3막 마엘로 자르지 말고, 1막 원정대 2막 데성드르 가문으로 잘랐으면 차라리 1편 2편 보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런 것은 개발팀에서 원하지 않았을 것 같다. 미니맵과 불편한 맵을 애초부터 의도했다는 것부터가 그들이 뚜렷한 철학으로 개발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게임보다는, 그냥 그들의 온전한 색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들의 기획 의도가 어떠하고 결과가 어떠하던, 현실적 상업성에 물들어버린 게임계에서 이런 예술을 추구한 게임이 나오는 것은 나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